포커스라이트 회장 필 더더리지(Phil Dudderidge) - 무대 뒤에서 음악의 미래를 설계한 남자

 음향 종주국(?) 영국의 사운드 엔지니어링의 역사를 돌아보면, 화려한 뮤지션 뒤에 묵묵히 ‘소리’를 지탱한 엔지니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에서 대중의 환호를 받는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공연장의 모든 순간이 그들의 손끝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소개할 필 더더리지(Phil Dudderidge)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그래미 테크상을 수상한 창립자 루퍼트 니브(Rupert Neve)로 유명한 '포커스라이트'를 인수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 자체도 루퍼트 니브만큼의 유명한 엔지니어이자 기업인입니다.

로드 매니저로 출발해 세계적인 오디오 브랜드 사운드크래프트(Soundcraft)를 창업하고, 현재 포커스라이트(Focusrite)를 이끌기까지, 그의 경력은 곧 현대 음향 산업의 연대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음향 엔지니어를 꿈꾸는 많은 분들께 본 글이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청년 시절과 첫 무대의 기억

1949년 런던에서 태어난 필 더더리지는 십대 후반부터 지역 밴드의 무대 세팅을 돕고, 앰프를 수리하고, 스피커를 들고 다니며 음향의 ‘물리적 세계’를 몸으로 익혔습니다.

1960년대 후반, 그는 페어포트 컨벤션(Fairport Convention)과 소프트 머신(Soft Machine) 같은 여러 밴드의 로드 매니저이자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라이브 사운드는 아직 체계가 부족했고, 공연마다 장비를 싣고 옮기며 직접 회선을 연결해야 했습니다. 이에 10대 시절부터 몸으로 익힌 음향/전기 기술을 겸비한 젊은 더더리지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이 시기 그의 손에 운명처럼 한 장의 연락처가 들어왔습니다. WEM(Watkins Electric Music)의 창립자 찰리 왓킨스(Charlie Watkins)의 연락처였습니다.


레드 제플린과의 운명적인 만남

찰리 왓킨스는 그를 레드 제플린의 매니저 피터 그랜트에게 소개했고, 그렇게 1970년, 스위스 몽트뢰 공연을 시작으로 필 더더리지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 엔지니어로 활약하게 됩니다.


<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 >


그 시절의 PA 시스템(PA, Pubic Address, 공연장 같은 곳의 음향 장비를 이야기한다.)은 지금 기준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원시적이었습니다.

양쪽에 4×12인치 스피커를 열 개씩 쌓고, WEM 5채널 믹서 두 대, 즉 총 10채널짜리 콘솔이 전부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의 직무는 라이브 사운드 엔지니어인 FOH(Front Of House)의 개념이지만, 믹싱 포지션은 관객석이 아니라 무대 뒤쪽에 있었고, 소리가 어떻게 나가는지 직접 듣지 못한 채 손끝 감각으로만 조정해야 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로버트 플랜트가 “트레블 더! 프레전스 더!”라고 외치지만 이미 모든 노브는 최대로 돌아가 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드럼 세팅도 단출했습니다. 킥, 스네어, 하이햇, 톰, 플로어 톰, 그리고 오버헤드 한 개. 존 본햄의 폭발적인 연주, 지미 페이지의 두 대의 마샬 앰프 스택, 존 폴 존스의 해몬드 오르간을 위한 레슬리 스피커, 거기에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까지 더해지면 무대는 거의 소리의 전쟁터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더더리지는 “존 본햄은 내가 평생 본 가장 시끄러운 드러머였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이 당시 그는 무대 뒤에서의 매일이 생존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투어에서는 지역마다 다른 음향 장비를 빌려 써야 했고, 트럭에 실린 시스템이 고장 나면 직접 고쳐야 했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트럭이 미끄러지 던 일, 공연 직전 교통체증을 뚫고 역주행으로 장비를 실어 나르던 기억, 그런 혼돈의 순간들을 겪었습니다. 정식으로 음향을 전공한 적이 없는 그는 그는 실전 무대인 이곳이 학교였습니다.



하이와트와의 시절 – 엔지니어로 발돋움

1970년대 초반, 더더리지는 레드 제플린 투어를 마친 후 하이와트(Hiwatt Amplification)로 스카우트되었습니다.

당시 하이와트는 강력한 헤드 앰프와 견고한 사운드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는 그곳에서 제품 개발과 시스템 설계 업무를 맡았습니다.

하이와트에 재적한 기간은 겨우 1년 정도였지만, 이 시기에 그는 단순히 공연을 지원하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사운드의 구조를 설계하는 엔지니어’의 타이틀을 달게 되었습니다.

그가 직접 설계에 참여한 일부 프로토 타입 앰프는 후일 데이비드 길모어(Pink Floyd)나 피트 타운젠드(The Who)가 사용하는 모델로 발전했습니다.

하이와트에서의 짧은 경험은 그에게 “현장 경험과 기술적 이해가 결합될 때 진짜 좋은 사운드가 나온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을 무대가 아닌 콘솔 뒤에서 음악을 완성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사운드크래프트 창업 : 휴대 가능한 콘솔의 혁명


< 필 더더리지와 사운드크래프트를 공동창업한 그레임 블라이 >

1973년, 필 더더리지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뮤지션 그레엄 블라이(Graham Blyth)와 함께 사운드크래프트(Soundcraft)를 설립합니다.

그들은 당시 공연 현장에서 반복되던 문제 — “좋은 콘솔은 있지만, 운반이 어렵다” — 에 착안, 곧 세계 최초의 모바일 레코딩 콘솔 시리즈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아이디어로 사운드크래프트는 단숨에 라이브 음향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특히 Series 1 콘솔은 모듈형 설계로 수리와 확장이 용이했고, 현장 엔지니어들이 콘솔을 밴에 실어 다니며 레코딩할 수 있게 해서 인기가 높았습니다. 더더리지는 필드 음향 엔지니어와 장비 엔지니어 출신 창업자 답게 마케팅보다 제품의 기능성과 내구성으로 회사를 키웠습니다.

그 결과 사운드크래프트는 1980년대 중반, 세계 주요 투어 콘솔 시장의 핵심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현재 사운드크래프트는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하만 인터내셔널 소속입니다.)


포커스라이트 루퍼트 니브의 철학을 잇다



1989년, 더더리지는 새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재정난에 빠져 있던 포커스라이트(Focusrite)를 인수합니다. 포커스라이트는 오디오 장비의 거장 루퍼트 니브(Rupert Neve)가 창립한 브랜드로, 원래는 대형 고급 스튜디오용 마이크 프리앰프와 이퀄라이저를 제작하던 업체였습니다. 니브의 콘솔을 많은 스튜디오에서 원했지만, 이러한 대형 콘솔은 한번 설치하면 수십 년을 쓰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어려웠고 회사가 재정난에 빠진 것입니다.

더더리지는 “스튜디오가 점점 작아지고, 기술은 가정으로 들어올 것이다”라고 내다보고 기술과 브랜드 가치가 높은 포커스라이트를 인수하고 홈스튜디오(홈레코딩이라고도 부르는)시장에 진출합니다.

그는 포커스라이트를 하이엔드 브랜드를 바탕으로 홈레코딩·프로슈머 제품(지금은 스칼렛 오디오 인터페이스로 유명한) 핵심 기업으로 변모시켰습니다.

현재 Scarlett, Clarett 인터페이스 시리즈는 전 세계 뮤지션들이 가장 먼저 추천하는 장비가 되었습니다.

그 사운드 철학은 “투명하지만 따뜻한 톤”이며, 그의 리더십은 엔지니어 중심의 조직문화입니다.

그는 수시로 직원들에게 직원들에게 “좋은 장비는 귀로 판단한다. 숫자는 참고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측정값보다 청취 경험을 우선시합니다.



산업과 인간 사이의 다리

필 더더리지는 평생을 “소리의 통역자”로 살았습니다. 레드 제플린의 라이브 사운드 엔지니어일 당시 혼돈의 무대, 하이와트의 실험실, 사운드크래프트의 혁신, 포커스라이트의 세계화까지....

그의 삶은 음악 산업의 발전사와 완전히 맞물려 있습니다.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였지만, 늘 뮤지션의 입장에서 생각 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콘솔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무대와 관객을 연결하는 다리”였고, 그 철학은 지금도 Focusrite Group의 사훈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포커스라이트의 경영은 AVID 출신의 전문 경영인 팀 캐롤(Tim Carroll)이 주도하지만, 현재까지도 회장(이사회 의장)의 자리에서 회사의 전략적 방향을 이끌며, 젊은 세대 엔지니어들에게 기술과 예술의 균형을 강조하고 포커스라이트의 혁신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는 2024년 음악 산업에 끼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OBE(Offic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를 수여받았습니다. 포커스라이트는 2025년 창립 40주년이 되었으며, 필 더더리지와 함께 이 역사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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